화재나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오는 영웅 같은 존재가 있어요. 바로 소방관들이죠.
소방관의 일은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막중한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요. 이 과정에서 소방관 마음에 옮겨 붙은 불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소방관은 참혹한 사고 현장을 숱하게 목격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죠. 이런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자주 접하기에, 소방관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병률은 일반 시민에 비해 10배 가량 높다고 알려져 있어요. 여기에 조직생활, 인간관계, 가정과 같이 일상적인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 더 쉽게 PTSD에 이를 수 있죠.
따라서 소방관은 그 누구보다 평상시 마음건강 관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R&D Lab이 만나본 소방관 중 심리상담을 이용해본 분들은 많지 않았고, 간혹 있어도 꾸준히 이용하지는 않았어요.
소방청에서 제공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도 있고, 찾아보면 지자체 무료 상담 제도도 있을텐데, 이용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걸까요?
소방관이 상담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R&D Lab은 소방관이 상담을 시작하고 이용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상담을 제대로 경험해본 소방관이 드물다보니 인터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9개월에 걸쳐 소방관 14분께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해보면서 PBR을 진행해보았죠.
*PBR(Project Based Research) : 프로젝트에 기반한 리서치로, 행복나눔재단 R&D Lab의 조사 방식입니다.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라도, 우선 소규모 프로젝트를 해보면서 세부적인 어려움을 파악합니다.
그 결과,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요. 바로, 상담 시작과 진행이 늦어진다는 점이었어요. 필요성을 인지하고 상담을 신청한다고 치면, 바로 그 주나 다음 주에 첫 상담을 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소방관은 상담 참여를 결정하고 첫 상담을 받기까지 평균 22일이 걸렸어요. 또한 전문 상담 기관에서는 몰입을 위해 상담 간격이 최대 14일이 넘지 않도록 권장하는데요, 소방관은 상담이 끝나고 다음 상담을 받기까지 평균 18일이 걸렸어요. 즉, 상담의 효과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상황인 거죠.
원인은 불규칙한 근무와 불편한 예약 방식에 있었어요. 소방관은 갑작스럽게 출동하거나 주야간 근무를 번갈아 하는 등 근무가 불규칙한 편인데요. 그러다 보니 예약을 미루는 일이 잦고, 상담을 안정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워요. 또한 많은 심리상담 센터가 전화로만 예약이 가능한데, 상담 일정을 자주 바꿔야 하는 소방관에게는 매우 불편한 시스템이었죠.
즉, 소방관은 근무 여건 상 상담을 시작하고 지속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R&D Lab은 이러한 방해 요소를 제거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근무 체계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예약 시스템을 조금 더 편리하게 바꾸는 건 가능할 것 같았죠.
그래서 불편한 예약 시스템을 Last Mile이라고 정의하고, 물리적 문턱을 낮춰보는 것부터 시도해보기로 했어요. 이렇게 소방관에 최적화 된 상담 모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Last Mile: 소셜섹터의 성장 덕분에 우리 사회는 많은 사회문제 솔루션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런 솔루션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들에게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작은 간극들(Last Mile)이 남아있습니다. 행복나눔재단은 이러한 간극(Last Mile)을 찾고, 이를 메우는 사업모델을 만듭니다.
소방관 심리상담 모델 개발 포인트
전문 상담 기관과 연계해 소방관 7분에게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해봤어요. 크게 두 가지에 포인트를 두었어요.
첫 상담 예약 쉽게 하기
R&D Lab은 첫 상담을 빠르게 시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우리도 마음먹었을 때 바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흐지부지 되기도 하잖아요. 더구나 근무가 불규칙한 소방관은 때를 놓치면 상담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상담 예약 방법을 간소화했어요. 먼저, 예약 방법을 전화가 아닌 온라인으로 바꾸었어요. 별도 앱 설치나 회원가입이 필요하지 않는 일정 관리 서비스를 활용해 상담 예약 페이지를 만들었죠. 그리고 상담센터와의 컨택과 일정 조율 같은 번거로운 절차는 프로젝트 담당자가 대신 맡았어요.
소방관 입장에서는 기존에는 상담센터 운영 시간에 맞춰 전화해야 했다면, 이제는 24시간 언제든 사이트에 접속해 원하는 날짜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회고를 통해 상담 몰입 지원하기
상담을 시작했으면 안정적으로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겠죠.
PBR에서 확인한 바로는, 소방관은 불규칙한 근무로 인해 다음 상담이 늦어지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근무 체계를 바꿀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상담 간격이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몰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죠. 그래서 기획한 것이 노트와 펜, 커피 쿠폰, 질문지로 구성된 상담 회고 패키지입니다.
상담센터에 부탁드려 첫 상담이 끝나면 이 상담 회고 패키지를 드리면서, 가까운 카페에서 회고 시간을 갖도록 권유했어요. 카페에 잠시 앉아 상담 때 느꼈던 기분이나 자신도 모르게 했던 이야기,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 등을 떠올리고 기록해보는 거죠. 그리고 이런 회고 활동을 인증하면 커피 선불 카드를 충전해주면서 다음 상담을 하도록 독려했어요.
최적의 상담 모델에 한 발짝
이렇듯 1차 프로젝트(2021.9~2022.10)에서는 온라인 예약 시스템과 회고 패키지를 도입해보면서 아래 3가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봤어요.
- 첫 상담이 빨라졌는지 → 쉽게 진입할 수 있다
- 상담 간격이 줄어들었는지 → 더 잘 몰입할 수 있다
- 상담을 끝까지 완료했는지 → 상담이 만족스럽다
먼저, 소방관의 첫 상담 시작 기간이 22일에서 10.4일로 반 이상 단축되었어요. 이는 R&D Lab에서 기준으로 잡은 10일에 근접한 수치로, 상담 진입 장벽 낮추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반면, 상담 간격은 18일에서 19일로 오히려 늘어났는데요. 코로나 등의 물리적 영향도 있었지만, 워낙 변화가 많은 소방관이기에 상담 기간은 큰 과제로 다가왔어요. 이 부분은 2차 프로젝트에서 보완해보기로 했어요.
*기준 기간 10일 : 필요성을 인지하고 상담을 신청하면, 보통 그 주나 다음 주에 첫 상담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7일과 14일의 중간 값인 10일을 기준으로 잡았어요
*기준 기간 14일 : 전문 상담 기관에서는 몰입을 위해 상담 간격이 최대 14일을 넘지 않도록 권고해요
상담 기간과는 별개로, 회고 노트와 상담에 대한 소방관의 만족도는 높았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소방관 7분 중 6분이 6~10회차 상담을 완료했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이후에 힘든 상황에 직면해도 극복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상담 때 느낀 위안이 증발되기 마련인데, 회고 노트를 쓰니까 나중에도 읽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회고 노트를 먼저 펼쳐볼 것 같아요.”
상담을 완료한 소방관
소방관에 최적화된 상담 모델을 찾는 여정은 이제 막 한 발을 뗐다고 할 수 있어요. 앞으로 프로젝트를 거듭하며 상담 모델을 조금씩 다듬어 나가려고 해요.
PBR과 1차 프로젝트를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소방관 심리상담 문턱 완화 프로젝트> 임팩트 텔링 리포트를 확인해주세요.
2차 프로젝트 이야기도 두 번째 리포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