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영어 알파벳이 200개라면 어떨까요?
영어 점자는 알파벳 26자에 해당하는 ‘정자’ 외에도, 두 개 이상의 철자를 축약한 ‘약자’가 존재해요. 점자를 빠르게 읽고 쓰고, 제한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글을 담기 위해서죠. 조금 이해가 어려우니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knowledge’라는 영어 단어를 원래 정자의 형태로 쓰려면 총 아홉 글자로 써야 하는데, 자주 쓰는 단어인 만큼 ‘k’ 한 글자로 줄여 간단히 표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영어 문장을 읽다가 ‘k’가 나오면 앞뒤 문맥을 고려해 ‘knowledge’로 읽고 해석하는 거예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죠?
이런식으로 자주 쓰는 단어 외에도 이중 자음(-ch, -th, -st 등), 영어 부호(세미콜론, 발음 기호 등)처럼 다양한 영어 약자를 포함하면 영어 약자는 거의 200개에 가까워요. 이와 같은 약자를 알고 있어야 영어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게는 영어 약자는 기본 알파벳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본적인 지식임에도 영어 약자를 모르는 시각장애 학생이 많아요. 실제로 R&D Lab이 맹학교에 다니는 중학생 9명에게 물어봤을 때, 약자를 완벽하게 아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중 3명은 아예 모르다시피 했고요.
어려운 영어 약자가 더 어려운 이유
영어 약자, 단순히 많고 헷갈려서 모르는 걸까요?
R&D Lab은 시각장애 학생과 학부모들을 인터뷰하며, 영어 점자 학습 환경을 더 자세히 알아봤어요. 그러자 미처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보였는데요.
맹학교(시각장애학생을 위한 특수학교) 영어 수업
맹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약자는 중학교 2학년부터 등장해요. 그런데 공통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따르다 보니, 정규 수업에서 따로 배우지는 않아요. 대부분 수업 전후나 방과 후 시간에 잠깐 배우거나, 집에서 혼자 공부한다고 해요.
학습 교재
적절한 학습 자료가 있으면 학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부 기관에서 만든 영어 점자 교재도 있어요. 하지만 R&D Lab이 물어봤을 때, 이 교재를 아는 시각장애 학생이나 학부모님은 없었어요. 설령 안다고 해도 내용이 어려워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보였죠.
동영상 강의
영어 점자 인터넷 강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아는 사람이 없었고, 강의 내용이 약자의 모양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정도에 그쳐 학생들이 혼자서 공부하기는 어려워 보였어요. (2021년 조사 기준)
물론 약자를 곧잘 아는 학생들도 있지만, 이는 대개 부모님이나 복지관 수업 등 개인적으로 배운 경우였어요. 영어 점자는 전문 교사가 아닌 이상 지도하기 어렵고, 관련 수업을 하는 복지관이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종합해보면, 영어 약자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수업이나 자료도 없이 개인의 의지와 재량에 맡겨진 영역인 거예요. 특히, 가장 기본적인 학습 도구인 교재조차 없어 스스로 공부하기 어렵고, 따라가지 못한 학생들은 결국 ‘영포자’가 되기도 한다고 해요.
이에, R&D Lab은 시각장애 학생들이 영어 약자를 혼자서 배울 수 있는 학습 교재가 없는 것을 Last Mile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에 대한 솔루션으로, 처음 약자를 배우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학생들을 위한 쉬운 영어 점자 교재를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Last Mile: 소셜섹터의 성장 덕분에 우리 사회는 많은 사회문제 솔루션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런 솔루션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들에게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작은 간극들(Last Mile)이 남아있습니다. 행복나눔재단은 이러한 간극(Last Mile)을 찾고, 이를 메우는 사업모델을 만듭니다.
쉬운 영어 점자 교재 만들기 포인트
1. 읽기 쉽게 만들자
R&D Lab은 오랫동안 맹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왔던 선생님과 함께 8개월에 걸쳐 교재를 만들었어요. 특히, 1)쉬운 단어를 쓰고 2)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학생들이 읽기 쉽게 쓰고자 했는데요. 예를 들어, 축어(단어 전체를 줄여서 만든 약자) 같은 어려운 학술용어는 ‘말줄임 약자’와 같이 쉬운 말로 풀어 썼어요. 또한 파인애플 ‘pineapple’의 ‘ea’는 약자가 있는데도 왜 정자로 쓰는지, 같이 학생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도 놓치지 않고 담았어요. (두 개 이상의 단어가 합쳐져 생긴 단어의 경우, 중간에 걸친 철자는 정자를 사용해요.)
2. 구하기 쉽게 만들자
기존 점자 학습 교재는 찾기도 어렵고 추가 인쇄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R&D Lab은 교재를 누구나 다운 받아서 보고 점자 인쇄를 맡길 수 있게끔 전자파일로 만들어서 에듀모아* 사이트에 올려 두기로 했어요.
*에듀모아 : R&D Lab에서 개발한 시각장애 학생 학습 포털 [에듀모아 개발 이야기 자세히 보기]
3. 빠르게 테스트 해서 만들자
교재를 만들 때 최종 사용자인 학생들의 의견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그래서 집필 완료 후가 아니라, 단원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의 피드백을 받아 즉각 반영했어요.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체크할 수 있도록 매 단원마다 평가지를 만들었는데요. 처음에는 평가지 항목을 2개 ‘안다’, ‘모른다’로 구성했는데, 학생들에게 적용해보니 점자 실력을 정확히 알기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항목을 총 5개로 나누어 ‘점자 모양 모름-발화 불가-명칭만 앎-용도만 앎-모두 앎’으로 세분화했어요. 만약, 다 만들고 나서 알았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수정하거나, 포기해야 했을 텐데 말이죠. R&D Lab은 이런 신속한 피드백 반영 구조를 만든 덕에 교재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2022년 3월, <치킨쌤과 함께하는 알기 쉬운 영어 점자>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어요!
53점 향상된 영어 점자 실력
교재는 실제로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유용했을까요? 영어 점자를 잘 모르는 시각장애 학생 3명을 대상으로 전후 테스트를 해봤는데요. 그 결과, 점수가 9점에서 62점으로, 평균 53점 향상된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테스트에 참여했던 학생과 학부모님의 반응도 긍정적이었어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영어 약자에 한 걸음 다가선 것 자체가 즐겁고 동기부여가 되는 듯했죠.
“약자에 이런 문자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배우게 되어서 좋아요.”
테스트에 참여한 시각장애 학생
테스트에 참여한 시각장애 학부모
쉬운 교재지만, 세상에 없던 책을 만드는 일인 만큼 여러 고민과 리서치 과정을 거쳤는데요. 그 이야기는 <영어 점자 교재 만들기 프로젝트> 임팩트 텔링 리포트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