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를 배우는 일은 어느 나라 아이들에게나 똑같이 고됩니다. 손끝 감각을 익히기 위해 같은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해야 하는 과정은, 언어가 달라도 국경을 넘어 동일한 어려움이에요. 그렇다면, 이 지루함을 해결한 솔루션이 국경을 넘는다면 어떨까요?
2026년 3월, 행복나눔재단에서 개발한 시각장애 학습 솔루션인 점자 학습 장난감 슬라이닷과 점자 학습지 점프를 품에 안고, 세계 최대 보조공학 컨퍼런스 ‘CSUN ATC(Assistive Technology Conference)’가 열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으로 향했습니다. 4박 5일 여정에는 행복나눔재단 시각장애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매니저 4명이 함께 참석했는데요, 오늘 노트에서는 곽예솔 매니저의 시선으로 쓴 CSUN ATC 탐방기를 전해드릴게요.
우리의 솔루션,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려면?
CSUN ATC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가 주최하는 세계적인 보조공학·접근성 관련 콘퍼런스로, 장애·접근성 분야 연구자, 전문가, 기업, 교육기관, 장애 당사자까지 매년 수천 명이 참가하는 행사예요. 시각, 청각, 지체 장애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솔루션과 최신 기술 트렌드가 공유되는 행사죠. 나이키, 구글, 메타 등 여러 기업 실무진의 발표 세션뿐만 아니라, 관련 솔루션을 직접 체험해 보는 부스와 연계 프로그램도 만나볼 수 있어요.
슬라이닷이 이 CSUN ATC에 참석하게 된 계기는 아주 작은 고민에서부터였어요. 슬라이닷은 프로토타입 개발과 솔루션 최적화 과정을 거쳐, 국내 시각장애 아동들과 여러 차례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점자를 만지는 것조차 꺼리던 아이들이 슬라이닷을 통해 즐겁게 점자를 학습하고, 실제로 점자 읽기 능력도 향상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슬라이닷이 교육 현장에서 진짜로 작동하는 솔루션임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자, 손끝 감각을 발달시키는 연습은 비단 국내 아동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와 국가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라 생각했죠. 해외 솔루션에 대해 데스크 리서치를 진행해봐도, 점자 학습 초기 단계에서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어요. 반면, 슬라이닷은 소프트웨어 운영 언어와 점자 카드만 바꾸면 언어권별로도 충분히 확장이 가능해 보였죠. 그래서 해외 확산을 목표로 하고,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해외 아동들을 만날 수 있을지 여러 통로를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사용자 규모가 가장 큰 영어권을 첫 번째 타깃으로 삼기로 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슬라이닷을 직접 사용할 해외 아동을 만나고, 파일럿 테스트를 함께 진행할 현지 파트너를 찾아야 했어요. 어떤 곳과 연계하면 좋을지 조사하던 중 ‘CSUN ATC’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미국 최대 시각장애 교육 기관인 APH도 매년 참가하는 대규모 컨퍼런스인 만큼, 이곳이라면 다양한 점자 교육기관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어요. 그렇게 CSUN ATC에 참가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CSUN ATC, 어떻게 갈까?
처음 행사 참여를 결정했을 때는 부스만 운영하는 것을 생각했어요. 행복나눔재단에서도 해외 박람회나 행사를 준비해 본 경험이 처음이라, 이미 CSUN ATC에 참가해 본 소셜벤처와 스타트업 관계자들에게 먼저 조언을 구했어요. 이때 “발표를 해야 부스에 사람이 온다.”, “발표와 전시가 구분되어 있어서, 발표만 듣고 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다른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경험을 떠올려 봐도, 부스 운영에 발표까지 더한다면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슬라이닷 개발기를 담아, From Boring to Playful: A Toy Solution for Braille Practice라는 제목으로 발표해 보기로 했어요. 이전 프로젝트 노트에서 소개한 슬라이닷 프로토타입 개발과 최적화 과정을 중심으로 발표를 구상하고, 신청서를 보냈죠.

부스에는 슬라이닷과 함께, 행복나눔재단에서 개발한 일일 점자 학습지 ‘점프(JUMP)’도 소개하기로 했어요. 점프는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수준별 일일 학습지로, 하루 15분씩 점자를 읽고 쓰며 익힐 수 있도록 만든 솔루션이에요. 국내에서는 슬라이닷과 점프를 함께 활용하기도 하면서, 아이들이 좀 더 쉽게, 차근차근 점자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현장의 반응 속에서 가능성을 엿보다
미국 현지 시간으로 2026년 3월 10일, 드디어 제41회 CSUN ATC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어요. 첫 일정은 슬라이닷의 발표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배정받은 발표장은 60~70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어요. 잘 알려진 솔루션도 아니고 행사에도 처음 참가한 터라, 360개 정도의 발표 세션이 열리는 가운데 우리의 발표를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실지 걱정이 되었죠.

다행히 발표장에는 교육기관 담당자와 교사, 시각장애 당사자 등 40여 명이 찾아와 주셨어요. 슬라이닷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브릭 장난감을 통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지 설명하는 동안, 청중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해 주셨어요. 발표가 끝난 뒤에도 많은 분들이 직접 슬라이닷을 사용해 보고, 질문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눠 주셨답니다.
미국의 점자 교육 현장에 슬라이닷의 문제 의식과 솔루션이 얼마나 닿을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요. 이미 다양한 교구가 마련되어 있는 미국에서도, 슬라이닷처럼 실물 크기의 점자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 연습할 수 있고 제작 비용도 비교적 낮은 교구에 충분한 수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슬라이닷이 어떤 연령대의 아동에게 적합한지, 점자 교육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지, 적응에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등 구체적인 질문을 많이 받았죠. 이를 통해 슬라이닷을 실제 교육 현장에 어떻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어요.

1일 차 오후 발표를 마치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스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부스는 슬라이닷과 점자 학습지 점프를 직접 살펴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어요. 마침 맞은편 부스의 대표님이 CSUN ATC 10년차 베테랑이시라, 시각장애인에게 어떤 동선이 가장 편리할지 조언도 얻을 수 있었죠. 아동을 위한 솔루션임이 부스 저 멀리서도 직관적으로 눈에 띌 수 있도록 원색을 배경으로 두고, 슬라이닷과 점프의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색상이 잘 돋보일 수 있도록 배치했어요.

덕분에 행사 4일 내내, 아동과 점자 교육에 관심 있는 먾은 분들이 행복나눔재단의 부스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방문해주신 분들이 남긴 질문과 반응 속에서, 우리 솔루션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었어요.
점프: 일일 학습지, 이곳에도 수요가 있다
이번 미국 출장을 준비하면서 품었던 고민 중 하나는, 한국에서 시각장애 아동들과 만나며 개발해 온 점자 일일 학습지가 미국에서도 필요할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미국에도 매일 조금씩 풀 수 있는 학습지 개념이 있을지, 그리고 이런 솔루션을 필요하다고 느낄지 궁금했죠. 보통 미국에서는 APH와 같은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시각장애 교육 자료를 기반으로, 교사가 아이의 수준과 상황에 맞게 교재나 교구를 커스텀해서 제작한다고 해요. 점프 학습지가 이러한 교육 환경에 잘 맞을지도 고민됐어요.

부스에 방문한 교사·교육기관 담당자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학습지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어요. 매일 15분씩 꾸준히 학습할 수 있는 분량이나, 스티커 붙이기나 만들기 등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가 있는 콘텐츠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거죠.
특히 점자와 묵자가 함께 인쇄되어, 보호자도 함께 학습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이 있었어요. 또, 총 200단계로 학습 수준과 목표가 체계화되어 있다 보니, 아이들에게 맞게 교재를 커스텀하는 기존 현장과도 잘 맞는 부분이 있었어요. 아이 단계에 맞춰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호응을 얻었죠. ‘영어로 제작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 한국어 학습지 샘플을 레퍼런스로 가져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면서 이곳에도 점프 학습지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슬라이닷: 체험에서 확인한 뜨거운 관심
슬라이닷은 점자 카드를 활용해 참여자들이 직접 문제를 풀어볼 수 있도록 기기와 영문 점자 카드를 비치했어요. 성인과 아이 모두 사용법을 궁금해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죠. 준비해 둔 점자 카드를 모두 풀고도 더 풀어볼 문제는 없는지 묻는 분도, 문제를 맞힌 뒤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바닥에 무릎을 꿇을 만큼 집중해 사용하는 분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편하게 반복 연습할 수 있는 장난감 형태와 게임 요소, 합리적인 가격*을 설명하자 참가자들의 관심이 이어졌어요. 현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지 묻거나, 판매 중이라면 지금 사고 싶다고 말한 분들도 있었죠. 이미 점자를 읽는 아이와 함께 방문한 보호자들도 처음 점자를 배울 때 이런 도구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의견을 남겨 주었어요. 이런 반응을 통해 슬라이닷이 실제 점자 교육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브릭 장난감으로 슬라이닷 기기 본체를 제작하는 데는 약 99달러가 들어요. 중고 스마트폰과 점자 카드 제작 비용은 별도예요.
적극적으로 체험한 참가자 다수가 향후 파일럿 테스트에도 긍정적인 의사를 보였는데요. 행사 이후 10곳이 넘는 기관에서 후속 미팅을 희망했고, 그중 5곳 이상이 파일럿 테스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미국에서도 슬라이닷과 같은 솔루션에 수요가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순간이었죠. 이 가운데 세션 발표 때부터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부스에도 다시 찾아온 한 점자 교육기관 담당자와 함께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하자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습니다.

가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장면들
이번 출장에서는 점프와 슬라이닷의 확장 가능성과 함께, 접근성을 기본값으로 삼은 현장의 모습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중 특히 기억에 남은 몇 가지 장면을 소개해 볼게요.
① 신청 과정부터 행사 운영 전반까지 접근성을 고려하고 있었어요.
웹페이지에 나와 있는 스케줄을 확인하는데, 처음에는 표나 그래프 없이 긴 텍스트로 이어져 있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이는 스크린리더 같은 보조기기가 정보를 빠짐없이 읽을 수 있도록 텍스트 기반의 구조를 택한 것이었죠. 또, PDF 같은 자료를 올릴 때도 게시자가 접근성 기준을 직접 확인하고 책임지도록 가이드하는 등 행사의 주요 프로그램뿐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까지 접근성을 기준으로 세심하게 설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② 시각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안내인이나 안내견 없이 흰지팡이를 사용해 혼자, 또는 함께 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어요. 특히, 시각장애인 여러 명이 함께 이동할 때 앞사람의 어깨나 등에 손을 얹고 줄지어 걷는 ‘체인법’도 실제로 볼 수 있었어요. 교과서나 맹학교 안에서만 접하던 이동 방식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모습이 새로웠죠. 흰지팡이를 사용할 때도 자세가 안정적이고 움직임도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이미지 제작에는 생성형 AI를 활용했어요.)
함께한 보행 교육 담당 매니저는 아동기부터 성인기까지 지속적으로 받는 보행 교육 덕분에 가능한 풍경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주었어요.
③ 필요한 도움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모습도 볼 수 있었어요.
대규모 행사임에도 동선 곳곳에 스태프를 배치하고, 먼저 나서서 도움을 건네기보다는 참가자가 스스로 이동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어요. 참가자가 스스로 이동하다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주변에 요청하면, 그를 돕는 과정 역시 자연스러웠죠. 실제로 한 참가자가 저희에게 거리낌 없이 도움을 요청하셔서 목적지까지 동행해 보기도 했답니다.

또, 한국보다 안내견과 함께 참가한 사람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었어요. 한국에서 주로 만나는 골든 리트리버 외에도 다양한 견종이 안내견으로 활동하고 있었답니다.

물론, 장애와 접근성을 다루는 행사였기에 접근성을 고려한 환경과 분위기가 더욱 잘 갖춰져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경험하는 대형 컨퍼런스와는 사뭇 다른 문화였기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며
CSUN ATC는 슬라이닷과 점프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솔루션인지 가늠해 본 첫 도전이었어요. 발표장에서 마주한 질문들, 부스에서 만난 다양한 반응과 파일럿 제안까지. 4박 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국내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이 언어와 국경을 넘어선 현장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이 노트를 쓰는 2026년 여름, 슬라이닷은 두 번째 미국 출장을 마쳤습니다! 앞서 언급한 점자 교육기관 담당자와 함께 미국 첫 파일럿 테스트를 준비했어요. 슬라이닷 사용에 필요한 물품과 설치 가이드를 전달하고, 참여자를 직접 만나 인터뷰도 진행했답니다. 과연 미국의 아이들도 슬라이닷과 함께 점자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행복나눔재단의 점자 학습 솔루션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새롭고 다양한 도전을 계속 이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