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을 기다리는 시간, 5개월

집 근처 서점이나 온라인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문제집. 그런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중간고사 기간이 다 되도록 문제집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물론 점자 문제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매년 국립특수교육원이나 복지관 등에서 문제집을 무료로 점역*해주고 있고, 장애인용 학습자료를 모아놓은 에듀에이블이라는 사이트도 있어요.

*점역 : 묵자(눈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점자로 번역하는 일

그런데 왜 시각장애 학생들은 문제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걸까요? R&D Lab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가 있었어요.

점자 문제집이 있는데 없는 이유

첫 번째 이유 : 신청한 문제집이 늦게 온다

점자 문제집을 신청하고 완성본을 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5.1개월이라고 해요. 12월에 신청해도 5월에 받아보는 셈이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신청해도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야 도착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시각장애 학생들은 문제집을 보며 예습은 커녕 진도에 맞춰 공부하기도 어려워요.

두 번째 이유 : 소량만 신청할 수 있다

국립특수교육원에서 시각장애 학생 한 명 당 지원하는 점자 문제집은 연간 4~6권 정도예요. 복지관에서도 점자 문제집을 지원하지만 이 역시 수량이 제한되어 있어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없어요. 사비로 제작하려면 적게는 2백 만 원, 많게는 2천 만 원 가까이 들기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어요.

세 번째 이유 : 예전 문제집도 찾기가 어렵다

최신 문제집이 늦게 오면, 아쉬운대로 이전에 만들어진 문제집을 보는 방법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정보가 흩어져 있다는 거예요. 에듀에이블에 모든 자료가 올라오는 건 아니다 보니, 어느 기관에서 어떤 문제집을 만들었는지 일일이 찾아야 해요.

R&D Lab은 이중 ‘첫 번째 이유’와 ‘세 번째 이유’에 집중해보기로 했어요. 여기서는 ‘첫 번째 이유’를 어떻게 풀어갔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세 번째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점자 문제집 검색 개선 프로젝트 관련 아티클을 참고해주세요.

문제집을 보는 새로운 시각, 단원별 동시 점역

점자 문제집이 제작되고 있지만 늦게 도착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것. R&D Lab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자 우리가 메워야 할 Last Mile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점자 문제집을 조금이라도 빨리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단원별 동시 점역’을 고안해냈어요.

점자 문제집이 늦게 전달되는 문제의 Last Mile

이 솔루션의 포인트는 전달 시점제작 인원을 바꿔보는 거예요.

전달 시점 : ‘한 권 완성 후’에서 ‘단원 완성 후’로

문제집을 꼭 한 ‘권’으로만 줘야 할까요?
기존에는 문제집 한 권을 다 점역한 뒤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전달했어요. 그러다 보니 1단원을 받으려면 마지막 단원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이를 각 단원의 점역이 끝나는 즉시 전달해, 완성과 제공 사이의 공백 시간을 없애고자 했어요.

제작 인원 : 한 명에서 여러 명으로

단원별로 주는 김에 단원별로 제작하면 어떨까요?
기존에는 한 명의 점역교정사*가 문제집 전체를 맡아 점역했어요. 안 그래도 점역은 수작업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업인데, 혼자서 하다보니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죠. 그래서 여러 명의 점역교정사가 단원별로 분담해서 전체 제작 시간을 줄이고자 했어요.

*점역교정사 : 묵자로 된 학습자료를 점자로 번역하고 교정하는 전문가

‘단원별 동시 점역’은 달리 말해, 문제집의 제공 단위를 ‘권’에서 ‘단원’으로 새롭게 인식해본 것인데요. 결과적으로 제작 비용이나 기술은 동일하지만 관점을 바꿈으로써, 같은 자원으로 당장 해볼 수 있는 해결책을 생각한 것이죠.

R&D Lab은 구상에서 그치지 않고 솔루션을 직접 테스트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점역교정사와 시각장애 학생들을 모집해, 단원별 동시 점역 방식으로 국어와 영어 점자 문제집을 만들어 제공해봤는데요.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제때, 빨리 받게 된 문제집

먼저, 단원별 제공을 통해 문제집 1단원을 학기 시작과 동시에 전달할 수 있었어요. 기존에는 1단원이 (마지막 단원과 함께) 중간고사 끝나고 도착했다면, 테스트에서는 개학 후 2주 안에 도착해, 시각장애 학생들이 예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동시 점역으로 문제집 한 권의 제작 기간도 3분의 1로 줄어들었어요(150일 → 42.5일). 줄어든 제작 기간 덕에 국어와 영어 문제집을 각각 4월 초, 중순에 전달할 수 있었어요. 즉, 시각장애 학생들은 진도에 맞춰 문제집 단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체 문제집을 중간고사 전에 받아본 것이죠.

단원별 제작 방식이 만든 변화 – ‘문제집 제공 시간 단축’

문제집을 ‘제때’ 받아본 시각장애 학생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어요.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를 통해 솔루션의 효과와 필요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문제집이 빨리 와서 예습할 수 있었어요.”
“문제집으로 공부하고 복습도 하니까, 발표할 때도 수월했어요.”
“문제집을 같이 보니까 영어 실력이 확실히 늘었어요.”
“전에는 시험 보면 망한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80~90점은 넘겠구나 싶었어요.”
테스트에 참여한 시각장애 학생

단원별 동시 점역 모델은, 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팀의 <시각장애 학생 점자 학습자료 제공 프로젝트>로 안착되어 지금도 발전을 이어가고 있어요.

여기에 다 담지 못한 R&D Lab의 고민과 시행착오가 궁금한 분들은 <점자 문제집 빨리 만들기 프로젝트> 임팩트 텔링 리포트를 확인해보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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